임진왜란 중 가장 중요한 해전, 노량해전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자 성웅이라고 불리는 충무공 이순신. 영화 명량, 한산, 노량을 보고 궁금한 점들이 많이 생겼다. 영화와 실제는 어떻게 다를까? 소설은 사실보다 더 사실 같아야 한다’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 고려거란전쟁도 찾아보면서 알게 된 것은 이 모든 것이 다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드라마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나를 더욱 가슴뛰게 만들고 역사를 재밌게 보게 만드는 것 같다. 이순신은 어떤 인물일까? 알면 알수록 그에 대해서 더 궁금증을 생기게 한다.
임진왜란의 3대 해전은 무엇일까?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수많은 전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코 해전이었다. 임진왜란의 3대 해전 중 이순신은 모두 참여하였으며 총사령관이기도 하였다.
한산도 해전이자 대첩이라고 불리는 첫 번째 해전은 조선과 일본간에 벌어진 첫 대규모 해전이었다. 조선의 군량 요충지인 전라도를 장악하기 위해 한산도를 점령하려 하는 일본군과 싸워 학익진 전법을 구사해 크게 이긴 해전이었다.
명량해전은 이순신이 옥고를 치르고 칠전량 해전으로 거의 모든 군함을 잃은 뒤 13척의 군함으로 133척의 일본을 올돌골이라는 곳으로 유인한 뒤 지형의 특이한 점을 잘 살려 이긴 전쟁이다. 거북선을 출격시켜 잘 활용하고 거북선에 대한 일본군의 공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투라고도 할 수 있다.
노량해전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일본군이 퇴각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한 후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해서 그들을 모두 섬멸하기 위해 명나라와 연합하여 벌인 전투이다.
노량해전은 왜 이순신에게 마지막 전투일까?
이순신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공을 세웠다. 선조는 대단히 외교술과 정치술이 뛰어난 임금이었는데 이순신이 임금보다도 더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조정의 대신들은 전쟁 이후를 준비하며 이순신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전쟁은 막바지로 무르익고 있었다.
이미 난중일기에도 나오지만 이순신은 수많은 갖가지 고생을 치르렀는데 아들이 일본군에게 죽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등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일본이 마침내 도망가는 것을 눈뜨고 찾아볼 수가 없었기에 명나라 도독 진린에게 눈물을 보이며 일본과의 전투를 재촉하는 등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후환을 남기지 않는 것에 간절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량해전은 완전한 마지막 전투가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아들 이면은 정말 일본군에게 죽었을까?
임진왜란 초기부터 이순신의 함대에 의해 해상으로의 보급로를 차단당하고 모든 해전을 대패하며 계획했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 원한관계로까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일본군은 충남 아산의 이순신의 고향을 습격하여 그의 아들인 이면이 싸우다 전사하게 되었다.
그는 특히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하는데 특별히 이순신이 아끼는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가 전사한 것을 알리는 편지를 받고 이순신은 자기보다 먼저 간 아들이 이치에 맞지 않고, 따라서 죽고 싶지만 가족이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목숨을 이어갈 수 밖에 없다는 말을 난중일기에 적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누구일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구성은 일본 열도의 각 지역마다의 수장이 임진왜란 당시 활동하는 각 군대의 사령관이기도 하였다. 자신의 군대를 각각 끌고와서 전투를 지휘하는 형식이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시마즈가의 17대 당주였으며 시마즈가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본에 존재하는 명문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였으며 진주성 전투에도 참가하고 칠전량 해전에서도 승리하였고 남원 전투에도 승리하였다. 계속되는 승리로 명나라사이에서는 그를 귀신 시마즈로 불렀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조차도 전대미문의 대승리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일본에서 최고의 명장이었고 지략가였다.
노량해전에서도 조명연합함대에 포위가 걸려든 시점에서도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이순신에게 패전하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 그는 목숨만 건진 채 일본에 돌아가게 되었다.
고니시는 노량해전에 참가했을까?
고니시는 노량해전 당시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연락선을 띄워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군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조명연합함대와 일본군의 수군이 노량에서 맞붙게 되는 거대 해전으로 까지 커지게 된다.
하지만 조선 해군의 위장함대에 뒤늦게 속아 함대를 출발시키게 되었고 노량에 도착했을 즈음 조명연합함대에 의해 시마즈 함대가 거의 격파당한 것을 보자 바로 되돌아갔다고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죽기전에 어떤 말을 했을까?
노량해전이 한창 치러지는 상황에서 일본의 마지막 발악으로 인해 이순신은 직접 활을 쏘다가 적의 탄환에 맞게 되었다. 이순신은 죽기 전에 결국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죽음 후 그의 아들은 흐느끼고 있었고 주위 군사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때 장수 손문욱이 아들의 울음을 멈추게 하고 북을 계속 쳤으며 진격하게 하여 군사들이 이순신이 죽지 않았다고 여기며 계속 공격할 수 있었다. 전투에서 장수가 죽으면 사기가 떨어지는 것이 당연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하긴 하다.
이순신은 정말 노량해전에서 북을 쳤을까?
실제로 북을 쳤는지 안 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하 장수들이 이순신에게 직접 활을 쏘고 돌팔매질을 하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충고를 하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이순신은 노량해전의 끝자락에서 난전이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직접 북을 쳤을 상황이 농후하다.
또한 그의 죽음 이후 손문욱이 이어서 북을 치게 하고 전투를 독려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그가 죽기 직전까지 북을 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았을 확률이 크다. 총사령관이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직접 북을 쳤다는 것은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봐도 정말 감동적인 부분이다.
이순신의 죽음 후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순신이 적의 총탄을 맞아 죽음을 맞이한 후, 휘하 장수 중 손문욱이 이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직접 북을 치면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진린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했고 거의 모든 병사들도 몰랐었다. 적들도 만약 이순신의 죽음을 알았다면 기세가 올라 더욱더 전투에 집중하거나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다.
손문욱은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알려져있는데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화하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는 인물이다. 확실한 것은 이순신의 휘하 장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계속해서 활약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노량해전 뒤 일본군은 어떻게 되었나?
노량해전의 목적 자체가 일본군에게는 조선과의 해전에서 승리하리라는 기대는 아예 없었다. 고니시나 시마즈 같은 다이묘들을 구출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성공하였지만 대부분의 함선과 병사들은 다 죽게 되었다. 이순신의 바람대로 일본군은 거의 궤멸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은 성웅 그 자체이다.
이순신과 노량해전 그리고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일본군 시마즈 요시히로와 손문욱의 이야기까지. 노량 해전을 파고들면 들수록 정말이지 신기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각자의 이야기속에 이순신이 왜 성웅일 수 밖에 없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순신은 마치 영웅이란 어떤 상황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프로그래밍이 완벽히 되어 그대로 행동하는 인물 같았다. 자신의 목숨보다 전투의 상황을 걱정하는 이순신은 우리에게는 구세주, 일본에게는 악마 그 자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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